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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를 채우는 게임, 증명의 무대

2026년 8월 26일 / 서울 / standard

#데굴데굴

요즘 계속 옛날 영화들을 보고 있는데 영자원 아저씨가 된 기분이다. 당연히 엄살이다. 주말의 명화 봤다고 하면 적당할까. 이번에는 파이트클럽 이야기다.

초반부 감각적인 연출을 집중 배치하면서도 어수선하지 않게 정리한 실력에는 감탄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서브리미널 컷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는 광고심리학 수업에서 배운 기억이 나 반가운 기분이다. 정확히 어떤 컷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멈춰보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타일러 더든의 모습이었다고. 초반부에 집중 배치해둔 게 좀 의아했는데, 이후 등장할 것에 대한 암시였다니 납득가는 이유다.

타일러 더든의 사보타지 시퀀스는 특히나 인상적이다. 내레이터가 더든의 행위를 제4의 벽 너머로 설명하는 동시에, 그 설명 자체를 스크린에 메타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경계를 완전히 허문다.

꽤 과감한 연출들이지만, 기법과 메시지가 서로 겉돌지 않기에 결코 산만하지 않다.

이케아 카탈로그 시퀀스도 재밌다. 제작 시기를 생각하면 영화 시퀀스로는 제법 파격이 아닌가 싶었는데 핀처가 광고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었다고. 한편 이케아 가구를 두고 고급이라고 하는 지점에서는 뻔뻔함에 좀 웃으면서 아메리칸 사이코를 떠올린다. 베이트먼이 소비로 존재를 증명하던 무대는 80년대 후반의 월가, 미드센추리 마스터피스로 채운 아파트였다. 내레이터는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시점에, 그저 그런 사무직으로서 이케아 가구로 꼭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소비로 공허를 채우는 공식은 동일했지만, 무대는 한 계급 내려와있다.

한편 스페이스 몽키와 프로젝트 메이헴을 생각하면서, 어떤 기시감과, 안도감, 혹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대남이라는 기시감, 그것이 새로운 문제는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40년째 이어지는 저 현상들에 대한 무기력감. 증명의 무대를 잃은 청년들은 어디서, 어떻게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지, 아직도 답이 없는 문제다.